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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콤플렉스

엠씨뱅크 2022. 7. 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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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언제나 그 만족감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 이 한계는 단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외적인 것이며 또 그 외적인 것에 의해 내 능력 또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나보다 훨씬 뛰어난 어떤 능력에 의해 내 능력을 상대적으로 조율당하고 사는 것이다. 이런 상대성과 한계는 인간을 한낮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1982년 일본판 알라딘과 요술램프에 나온 반지의 요정, 자파는 마법의 동굴에 알라딘을 내려보내면서 반지를 내어준다.출처 : https://m.blog.naver.com/coppelius/221510237127

 

알라딘은 마법사의 꼬임에 빠져 지하 동굴 깊은 곳에 숨겨진 요술램프를 구하러 내려간다. 마법사는 알라딘에게 위급한 순간에 사용하라고 반지를 내어준다. 이 반지는 손으로 문지르면 반지의 요정이 나타나고 주인이 직면한 어려움을 해결해준다. 반지의 요정은 인간에 귀속되어 있지만, 어쨌든 인간보다는 뛰어난 마법을 가지고 있고 또 수행한다. 이야기는 전개되고 반지의 요정이 다시 등장한다. 램프의 요정을 이용해 공주와 결혼한 알라딘이 밖에 나간 사이에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가 오래되어 낡아보이는 램프를 마법사의 얕은 꾀에 속아 바꿔버린다. 램프를 찾은 마법사는 다시 램프의 요정을 이용해 공주와 궁전 전체를 자신의 나라로 옮겨버린다. 공주를 찾아나선 알라딘에게 남은 것은 반지의 요정. 반지의 요정을 타고 마법사의 나라로 날아오는 알라딘의 모습을 본 마법사는 램프의 요정을 이용해 반지의 요정을 없앤다. 

 

램프의 요정 지니는 반지의 요정에겐 '넘사벽'

 

이 이야기의 은유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이전까지 많은 독자들은 반지의 요정과 램프의 요정이 어떤 능력의 차이를 가지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반지의 요정을 굳게 믿던 독자에게 이 장면은 충격적이다. 더군다나 이 이야기는 주로 어린 시절 읽혀진 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기서 느끼는 절망감은 정말 크다. 어쩌면, 필자의 어릴적 느꼈던 충격이 아직도 이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능력보다 뛰어난 반지의 요정과 램프의 요정의 대결은 이렇게 끝맺는다. 결국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이야기 속의 인간 외적인 능력 차이는 이야기의 끝과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위대한 이야기를 만든 작가는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힘의 한계를 드러내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운명에 대한 결정론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우리가 가진 힘의 한계,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우리가 부릴 수 있는 힘의 한계는 어떤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힘에 의해 조율되고 있음을 얘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약자들에게 램프의 요정이 쥐어진 적은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반지의 요정을 가진 알라딘이 램프의 요정을 이긴 적은 없다. 다만, 램프의 요정이 등장하기 전에 종결되었을 뿐이다.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시민 혁명도 마찬가지다. 램프의 요정으로 대변될 수 있는 절대 권력이 형성되기 이전에 사건은 종결되었고, 지금의 시민 운동은 너무 견고해진 램프의 요정 탓에 커다란 실효를 보고 있지 못한 것이다. 무의미 할지 모르지만 이를 다시 알라딘의 이야기에 대입시키면, 이야기 초반 램프의 요정을 찾으러 들어간 알라딘의 상태에서 시민 혁명이 성공을 이루어 낸 것이고, 램프의 요정이 등장하면서, 즉 절대 권력이 등장하면서 반지의 요정은 그 능력에 제한이 생겨버리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반지의 요정과 램프의 요정은 누가 다루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해방 전후의 혁명과 해방 이후에 이뤄진 많은 시민 혁명에서 개혁 세력을 무참히 짓밟은 것은 다름 아닌 한 민족, 그들의 친구, 형제, 자식들이었다.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읽어나가는 독자들이 마치 램프의 요정은 언제나 우리의 친구일 것 같이 생각하듯이 우리의 형제 자매, 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 의해 의지가 꺽인 것이다. 여기에서 오는 허무감은 알라딘의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허무함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왜 마석도의 폭력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

 

실제로 필자는 이러한 경험을 수없이 했었다. 어린 시절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의 능력에 전혀 의심이 없었지만, 부모님의 한계를 느껴야 했고, 내가 존경했던 선생님이 너무도 무기력하게 학교의 정책에 따라야 했다. 내가 믿었고 이 정도면 충분히 대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많은 존재들이 너무도 허망하게 무너지고, 또 짓밟혀졌다. 무언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거라 믿었던 사람들에게서도 반지의 요정밖에 안되는 그들의 능력을 깨닫고 말았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사회 전체로 놓고 볼 때 우리는 반지의 요정을 가진 알라딘과 램프의 요정을 가진 알라딘의 양면성을 같이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개인도 마찬가지고 어떤 단체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국가의 우열에 있어서도 이 양면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이 권력의 위치는 언제나 나아닌 다른 편에 서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위험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법 제도를 실천하고 지켜간다고 믿는 수많은 판검사, 변호사들이 언제나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고, 우리의 억울함을 보듬어 주리라고 믿었던 온갖 언론 매체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먼 곳에 있다. 어쩌면, 우리가 가진 이 반지의 요정같은 능력은 램프의 요정을 가진 자들의 정책적 배려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반지의 요정을 믿고 있는 한 우리는 절망만 더 체험할 뿐이다.

 

우리는 똑똑하고 청렴해보이는 지도자들은 많이 겪어봤다. 그냥 죄인에게 단호하게 칼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내가 직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진정한 대결을 펼치기 위해 우리는 반지의 요정마저 잃은 알라딘의 모습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겨울의 끝자락, 웅크린 몸을 한껏 피면서, 난 요정 없는 존재로서의 나를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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